6월 논산여행 인물과 함께하는 문화유산답사II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 그리고 죽림서원
조선 2대포구로 명성자자 했던 강경포구. 강경하면 서해에서 포구로, 포구에서 서해로 각종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들로 왁자한 큰 포구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강경포구의 그 큰 뱃길을 가로질러 부여의 임천과 서천의 한산으로 길을 잇던 나루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황산나루’가 그것. 나루 언저리 황산과 황산포가 있었기 때문에 나루의 이름이 유래되는 황산나루는 부여와 서천사람들이 조선의 3대 시장인 강경을 오가는 중요한 수상교통로였다. 강경시장의 명성에 걸맞게 나루 또한 금강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던 황산나루는 1988년 황산대교가 준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황산나루는 사라졌지만 황산과 그 산자락에 둥지를 튼 황산리는 여전히 남아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가 그것. 황산대교에서 황산의 북쪽 봉우리 ‘돌산’까지 500m의 강변도로와 그 일대를 공원화 하여 시민과 관광객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해놓았다. 황산나루일대는 금강을 비롯해 그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던 강경의 명승이었던 점을 살린 것이다.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의 중심이 되는 곳은 황산이다.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 선현의 자취 어린 임이정과 팔괘정이 금강을 바라보며 황산마루에 앉아있고,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 성현의 위패를 모신 죽림서원은 두 정자 사이 평지에서 둥지를 틀 듯 황산자락에 기대어 금강을 바라보고 있다.
문화의 거리에 가면 정자에 오르고 서원을 거닐며 옛 조상들의 삶과 생애를 돌아보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하자.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거리의 북쪽 가장자리 돌산위로 동선은 이어진다. 돌산 위에 우뚝 서있는 하얀 탑은 황산과 금강을 아우르는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다. 전망대에 올라 전망을 즐기고 나면 또 하나의 명소가 기다리고 있다. 돌산자락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 황산옥이 그것. 이 집은 3대 째, 황산나루의 맛을 지켜오고 있는 90년 전통의 맛집으로 복요리와 우어회로 식도락객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 전경.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문화의 거리는 소나무 위로 보이는 하얀탑(돌산전망대)이 있는 돌산까지 약 500m 남짓의 거리다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죽림서원 전경
임돌산의 정상에 우뚝 서있는 돌산전망대. 이 전망대에 오르면 금강과 강경일대가 조망된다. 이곳에서 강경의 일출과 일몰, 야경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돌산전망대에서 바라본 황산대교와 금강. 서해로 흘러가는 금강의 큰 물길은 서천과 군산을 잇는 금강하굿둑에 가로막혀 더 이상 흘러가지 않는다. 뱃길과 함께 우어, 황복 등 강경에서 많이 잡히던 어종도 사라졌다.
황산옥은 황산나루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토속음식점이다. 황복이 멸종위기종이라서 주 메뉴였던 황복요리가 참복요리로 바뀐 것 뿐, 복요리 전문집으로서의 명성이 녹슬지 않은 이 집은 복요리와 더불어 우어회 또한 이름난 집이다. 복탕과 우어회가 주 메뉴인 것은 90년 동안 바뀌지 않은 이 집의 자랑거리. 시할머니부터 시어머니에 이르는 57년 내림 손맛을 며느리가 이어받아 3대째 90년 맛집으로 성업 중이다. 식당만 대를 이은 것이 아니다. 부모님 손잡고 어려서부터 황산옥을 찾았던 기억과 맛을 잊지 못하는 장성한 손님들 또한 3대에 걸쳐 단골이 된 것. 복어요리가 주특기인 이 식당은 복어요리의 메뉴도 다양하다. 복사시미(1kg 15만원), 생복찜(대 10만원, 중 9만원, 소 8만원) 등을 비롯하여 복찜, 생복찌게, 복찌게 등을 맛볼 수 있다. 가벼운 한 끼 식사로 복요리를 맛보고 싶다면 1인분도 가능한 생복탕, 복탕 등의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우어회 또한 이 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대표적 메뉴, 90년 전통의 맛을 고스란히 지켜오고 있다. 우어는 3, 4, 5월에만 잡히는 계절 어종으로 봄철 산란기의 우어가 연어처럼 바다에 살다가 알을 낳으러 강을 거슬러 오를 때 금강에서 많이 잡혔다. 하지만 이상기온으로 딱 3개월만 아니라 봄철 전후로 더러 잡히기도 한다. 12월부터 7월까지 봄철을 제외한 기간에도 운이 좋으면 생물을 맛볼 수 있다. 황산옥에서는 우어를 급랭시켜 신선도를 유지해, 냉동참치 녹여먹듯 우어회와 무침을 연중 맛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우어는 봄철에 잡히는 산란기의 우어가 먹기에 좋고 맛도 좋다. 산란기의 우어는 뼈가 연한 것이 특징으로 뼈째 썰어 회를 내거나 무침을 한다.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회 맛도 좋지만 미나리, 오이, 고추, 등 갖은 야채와 초고추장, 참기름 등 갖은양념을 버무려 손님상에 오르는 우어무침의 고소하면서 새콤달콤한 맛 또한 일품이다.(문의 및 예약: 041-745-4836)
황산옥에 가면 꼭 맛봐야할 복탕과 우어무침
복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는 복탕에서 미나리는 빠질 수 없는 재료. 미나리와 복은 찰떡궁합으로 맛과 영양을 서로 보완해준다.
복탕이 상에 오르면 먼저 고기를 앞사라에 건져낸다.
앞사라에 건져낸 고기는 겨자를 푼 소스에 찍어먹는 게 제맛. 황산옥의 복탕은 생복탕과 냉동복탕 두가지 메뉴가 있다. 생복탕은 살이 “살살” 녹고, 냉동탕은 쫀득한 식감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우어무침은 우어가 잡히는 철이 아니면 냉동어를 쓴다. 1930년 중반 조깃배의 조기를 저장하고자 강경포구에 냉동시설이 설치되고부터 우어 냉동저장을 시작해 연중 우어의 맛을 볼 수 있다.
갖은 양념과 야채를 버무린 우어무침. 모르고 먹으면 냉동시킨 생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살결과 맛이 살아있다.
김에 싸서 먹으면 우어무침의 매콤, 새콤한 맛에 풍미를 더하여 즐길 수 있다. 강한 맛이 좀 순해지는 느낌. 그냥 먹기도 하고 김에 싸먹기도 하고, 취향 따라 다르지만 두가지 맛을 동시에 즐기는 식도락객들이 대부분이다.
작가가 본 6월여행
황산대교에서 돌산까지 500m 남짓, ‘강경지방 문화의 거리’의 중심은 거리상으로 보나 의미상으로 보나 ‘죽림서원’이다. 죽림서원의 창건연대는 1626년. 서원의 남쪽 산마루에 있는 임이정, 그리고 북쪽 산마루에 있는 팔괘정과 창건연대를 같이하고 있는 이 서원은 두 정자의 가운데 위치하기도 하지만 임이정과 팔괘정에서 각각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스승과 제자,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열은 온돌을 들인 방으로 죽림서원의 강학처,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오늘날 기숙사 역할을 하던 곳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집, 외삼문 쪽 한 칸은 부엌을 들인 집이다.
황산서원의 관문 홍살문. 서원을 들어서기 위한 첫 문이며 이 문을 돌어서려면 말이나 마차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 선현을 모신 엄숙한 공간이자 유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으로 몸동작과 마음 모두 정숙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측면에서 바라본 홍살문과 외삼문. 홍살문 위로 보이는 정자가 임이정이다. 서원 뒤란 무성한 대숲이 서원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죽림서원의 외삼문 전경. 외삼은을 출입하는 데 법도가 있다. 양 측면의 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고 중앙의 문은 신들이 다니는 문이다. 중앙의 문 출입은 절대 금물. 들어갈 때는 오른쪽 문을, 나올 때는 왼쪽문을 사용한다.
오른쪽 건물이 강학공간인 동제이고 왼쪽 건물이 유생들이 기숙하는 서재이다. 규모가 큰 서원은 강학당을 따로 두지만 죽림서원의 경우 생략됐다.
외부에서 바라본 동재와 서재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는 죽림서원의 강학공간에서 사당 쪽을 바라보면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사당 뒤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강학공간보다 낮으막하게 단을 높힌 제향공간으로 가기 위해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죽림사’라 현판을 단 사당 앞에 서게 된다. 죽림서원에서 가장 격이 높은 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양 옆면에 풍판을 달아냄으로서 건물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18현 중 6현의 선현이 모셔져있다.
6현서원’으로도 한 때 불리었던 죽림서원의 별칭은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명현 18현 중 6현의 선현을 배향한데서 비롯된 것. 초창당시 이이와 성혼을 기리고 지역의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이 서원은 지명을 따서 ‘황산서원’이라 이름 짓고 운영하면서 김장생을 추가로 배향하기에 이르고 이후 조광조와 이황 또한 추가로 배향 돼 사액서원이 되기까지 5현의 선현을 배향하는 서원이 된다.
외부에서 바라본 죽림사. 죽림서원의 내삼문은 솟을삼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솟을삼문은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대문을 말하며 가운데 문을 '정문'이라하고 양쪽 문을 협문이라 한다. 보통 때는 양쪽협문만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지낼 때 세 문을 다 열어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죽림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영정각은 1단의 방형 기단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후면 1칸은 분합문을 설치한 제향공간으로 조성하여 신위를 모신 내부공간의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죽림사 전경
측면에서 바라본 죽림사 전경
앞면 1칸은 퇴칸이다. 원기둥이고 기둥머리에 공포를 짜 올린 익공식 구조이다.
사당의 내부 우암 송시열을 마지막으로 6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있다.
현종 4년(1663) 중수를 거친 황산서원 경내에 이듬해인 현종 5년(1664), 송시열이 쓴 비문(황산서원비 또는 죽림서원묘정비)이 서원의 내력을 잘 말해주고 있다. 황산서원중수비와 나란히 사당 오른쪽에 남아있는 비는 ‘황산서원지비(黃山書院之碑)’라고 비명이 비의 중앙에 크게 자리 잡고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윤곽이 뚜렷하고 특유의 투박한 획이 돋보이는 팔분체의 비명을 중심으로 새겨진 비문은, 어떤 이가 송시열에게 5현을 배향하게 된 연유에 대해 묻고 송시열이 당위성을 논하는 문답식의 문장이다.
비문의 내용인 즉,
어떤 이가 “김장생은 이곳이 연고이지만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같은 선생들은 어째서 여기에 향사하였는가?” 묻자. “옛날 중국 무원의 유학자들이 지역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성현을 제사함에 처음에는 무슨 예에 근거가 있으며 의리에 마땅한가. 해서 그 사우의 일을 기록했으니 그 성현의 학문이 온전히 전해져 계승되고 있는 곳이면 누구나 사당을 세워서 학자들로 하여금 성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며 본받게 해야 한다.”했다는 기록을 예를 들어 4현 제향의 합당함을 말하자 어떤 이는 인정했다.
어떤 이는 또 “옳지만 우리나라 선현 중에 마땅히 학문과 덕행을 기리며 본받을 만한 분이 많은데 그만한 이유가 있는가?” 묻자. “옛날 이이가 소현서원을 지어 주자를 모시고 조광조와 이황을 배향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깊은 의미가 있겠고, 율곡, 성혼 같은 분은 김장생이 존경을 해서 제사를 지내니 지금 네 분의 제사도 율곡이 소현서원에서 하듯 해야 한다.”며 답을 하고 덧붙이기를 “만약에 이러한 배향 배경을 설명하지 않으면 후생들이 선현들의 항렬이나 나이를 따져 빗대어 보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니 그 죄가 어떠한가.”하며 서원에 배향된 선현의 배향 의미와 배향된 순서가 학문적 서열임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다섯 분 선생의 그 도학이 어떠하며, 후생들의 학문에 미치는 바가 장차 어떠하겠는가?” 하며 어떤 이가 다시 묻자. 다섯 분 선생이 강론하던 것은 주자(周子)ㆍ이정자(二程子)ㆍ주자(朱子) 네 분 부자(夫子)의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역설하며 “이정자로 하여금 깨우침을 얻은 5선생이 스스로 사람을 가르치는데, 후학들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오 선생 외에 어찌 다른 선현을 찾을 수 있겠는가.”하며 5현을 황산서원에 배향하게 된 당위성을 이야기하며 서원 중수에 대한 이야기로 말미를 장식하고 끝을 맺는다.
죽림사 오른쪽에 중건비와 황산서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윤곽이 뚜렷하고 특유의 투박한 획이 돋보이는 팔분체로 비명이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전란으로 인하여 명장, 명현의 시신을 찾지 못하거나, 묘를 잃어버린 경우에 단을 만들어 묘소를 대신하는 것을 단소라고 한다. 이 단소는 죽림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지방 유림들이 사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던 단소로 선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 6분의 신위가 새겨져 있다.
서원비가 경내에 세워진 이듬해인 현종 6년(1665)에 황산서원은 임금으로부터 ‘죽림’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된다. 사액서원이 되면 서원의 격이 상승하여 관립기관에 대응하는 지방교육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현판과 서적을 하사받고 서원 소속의 전답과 노비에 대한 면세와 면역의 특권이 주어지는 것. 이후 사액서원이 된지 30년, 송시열이 죽은 지 6년 되는 해인 숙종 21년(1695), 죽림서원은 송시열을 마지막으로 추가 배향하여 6현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살아서 존경의 대상이었던 송시열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제주로 유배되어 사사되고 그의 명예는 6년간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이후 1694년 갑술환국으로 숙종으로부터 다시 신임을 받아 그의 명예는 복권되고 마침내 조선의 성현으로 추증되어 영원한 영예를 얻는다.
죽림서원 또한 송시열의 개인 삶과 마찬가지로 시련기를 겪게 된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94년간 암흑기를 거치게 된 것
유림들이 그 유허지에 단소를 설치하여 향사를 재개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그마저 행사하지 못하다가 해방 후인 1965년 사우가 복원됨으로서, 사액서원으로서의 면모를 되찾는다. 그로부터 19년 후인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75호로 지정되어 영원한 사액서원으로서의 옛 영예를 다시금 얻게 된다
죽림서원에 가면 황산서원비와 그 중건비, 그리고 서원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단소비를 살피고 서원의 안마당을 거닐며 생각 해 볼일이다. ‘세상에 영고성쇠의 길은 있을지언정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문화가 면면히 살아 숨 쉬고 그것을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과 희망이 있는 한, 죽림서원은 우리문화의 근간이 되는 유교문화와 그 학문으로 대성한 성현의 발자취를 후손 대대로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정면에서 바라본 죽림서원 외삼문의 중앙문. 서원의 현판이 걸려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죽림서원의 외삼문
죽림서원 현판 근경
죽림서원 현판 앞의 조그만 편액의 ‘유도문(由道門)’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도에 의지하여 따르고 행하라”는 뜻이다.
죽림서원을 돌아보고 임이정에 올라 선현의 자취를 보고 느끼고, 다시 팔괘정에 올라 죽림서원을 바라보노라니 이 나라 선현의 반열에 나란히 오른 스승과 제자의 학문과 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팔괘정에 서서 무심히 죽림서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제자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의 임이정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궁금증이 인다.
팔괘정을 뒤로하고 잘 정돈된 계단을 따라 잠깐 오르니 돌산 정상이다. 돌산 정상부는 전망이 탁 트여 굳이 전망탑이 없어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광을 즐길 만큼 경치가 괜찮지만 탑이 있으니 오를밖에. 탑의 입구로 발길을 옮기니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금강의 큰 물길이 강경 땅을 적시며 도도히 흐르는 풍광이 펼쳐진다.
전망탑 꼭대기에 오르면서 내내 죽림서원 일원의 전경이 궁금했다. “과연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이 상상속의 그림을 그려낼까?” 전망대에 올라 황산 쪽을 바라본다. 두 정자는 강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황산마루에, 서원은 평지 산자락에 자리하고... 금강의 큰 물길이 황산일대와 함께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 황산나루에 배가 다니고, 죽림서원 앞은 금모래반짝이는 모래사장이 펼쳐졌던 시절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세월의 변천에 따라 변해버린 지금의 풍경도 어쩌면 먼 훗날 그리운 풍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만이라도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죽림서원과 임이정, 팔괘정에 더 이상 변화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싶다. 그 풍경을 뒤로하고 나선형계단을 내려서자니 입구에 다다라 발은 얼어붙어 움직일 줄 모른다. 푸른 바다와 백색의 건축물이 어우러진 지중해의 풍경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후의 태양을 받아 더욱 빛을 발하는 흰색의 아치형 출입구는 액자처럼 푸른 물결 넘실대는 금강의 풍경을 담아내, 지중해의 어느 사진에서 본 듯한 느낌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서원 서재 뒤로 ‘죽림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왼쪽 숲 위로 솟은 탑이 돌산전망대다.
돌산에 오르면 지금은 터만 남은 강경포구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외쪽 언덕은 옥녀봉, 논산8경 중의 하나이다.
전망대의 나선형 계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경시가지. 전망대에 오르면 금강과 강경시가지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산일대.
전망대를 나서기 직전, 아치형의 하얀 출입구가 그려낸 지중해풍의 풍경.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
논산시 문화관광과 041-746-5401-4
율곡 이이·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우암 송시열 등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이이와 성혼을 기리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황산서원이라 하여 세웠다. 후에 김장생을 추가하였으며 이후 조광조·이황·송시열의 위패를 추가했다. 현종 6년(1665)에 임금으로부터 ‘죽림’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46년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65년 사우를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은 출입구인 홍살문과 외삼문을 통하면 동재, 서재, 내삼문, 사우가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죽림서원의 중건비와 황산서원의 지비를 세워 놓았다. 사우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이 서원은 문묘에 모시고 있는 선현들만 모신 서원으로,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