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논산여행 예학의 고장 논산을 찾아서Ⅱ
'희니논쟁'을 말하다, 노강서원
논산은 선비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많은 유교문화자원이 남은 곳으로 충청도 유교문화권의 중심이다. 영남유학의 본산이 도산서원과 안동일대 라면 기호유학은 연산의 돈암서원과 노성의 노강서원이 그 중심이며,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집, 명재 윤증 등 조선후기 한국의 학문계와 정치계를 대표하는 걸출한 인물을 낳은 본고장이다. 이와 같이 논산은 조선시대 예론(禮論)과 산림 인사들의 거점이었다.
논산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예학의 태두 김장생의 문하에서 같은 학맥, 같은 학문, 같은 목소리로 조선예학을 주도했던 인물 중 우암 송시열과 그의 제자 명재 윤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1659년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례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을 ‘예송논쟁’이라 한다. 이 때 남인 대 서인의 명분론적 갈등에서 당시 서인이었던 윤증의 아버지 미촌 윤선거가 보여준 남인 윤휴에 대한 미온적 태도는 송시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윤선거와 윤휴는 친분이 있었다. 이 일은 윤선거의 사후 ‘희니논쟁’의 근원이 됐다.
희니논쟁은 숙종 6년(1680) 남인의 처벌문제로 서인 내부에 분열이 발생되자, 집권당인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지면서 강경파의 영수 송시열에 맞서는 온건파의 영수로 윤증이 추대되고 노·소론으로 갈라져 치열한 당쟁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희니논쟁은 송시열의 거주지는 ‘회덕’이고 윤증은 ‘니성’에 살았기에 붙여진 논쟁을 일컬음이다. 이 사건 이전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은 후 스승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문을 청했지만 일의 처리를 두고 서로 마뜩찮았던 앙금이 남아있었다.
결국 돈암서원과 노강서원은 송시열 중심의 노론계열과 윤증 중심의 소론계열의 본거지로서 당쟁의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예학의 태두 김장생의 문하에서 같은 학맥, 같은 학문, 같은 목소리로 조선예학을 주도했던 학자로서의 기본 정신은 두 서원 모두에 흐르고 있다. 돈암서원과 노강서원은 17세기의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으로 희니논쟁 이전에는 어떠한 당파적 갈등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숙종 1년(1675), 서인이 조정의 중책을 맡아서 활동하던 때 조정의 명망 있는 관리들이 노·소론 구분 없이 서원의 건립을 발의하고 추진하여 노강서원이 건립됐다. 돈암서원과 더불어 조선 중·후기의 조선예학을 쌍두마차처럼 주도했던 노강서원은 2011년 12월 보물 제1746호로 지정됐다.
노강서원 홍살문과 외삼문. 노강서원은 숙종 1년(1675)에 건립되어 숙종 8년(1682)에 사액된 서원이다.
노강서원의 강학공간전경. 강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남아있다.
노강서원 강당. 강당 앞의 비는 서원의 원정비이다.
노강서원의 사당 숭의재. 팔송 윤황(1572~163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선 숙종 1년(1675)에 처음 세워진 후, 숙종 8년(1682)에 임금으로부터 ‘노강’이라는 현판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후에 윤문거를 비롯하여 윤선거·윤증을 함께 모셨다.
노강서원은 1675년에 건립한 이후 한 차례도 이건하지 않고 대원군 때 돈암서원과 함게 훼철되지 않은 기호유학의 대표적 서원이다. 내년이면 창건 340년을 맞는 유서 깊은 서원이다. 마을 뒤 낮은 언덕에 터를 닦고 앉은 이 서원의 사우는 전학후묘 형식으로 기호지역의 배치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원의 외삼문. 솟을대문의 형식으로 지어졌다.
서원의 서재. 강당을 중심으로 직각으로 배치되어있다.
서원의 서재 근경. 동재와는 달리 부엌이 딸려있다.
서원의 동재. 앞면 4칸 옆면 2칸의 맞배집이다. 박공부분에서 지붕을 더 연장하여 비바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려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재 옆 마당에서 바라본 서원의 강학공간 전경.
강당의 뒤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 후면에서 바라본 사당의 외삼문.
숭의사 전경. 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숭의사로 이어진다.
숭의사에는 은행나무고목이 서너 그루 자라고 있다.
고목에서 바라본 숭의사.
1675년 창건의 돈암서원, 1634년 창건된 노강서원. 돈암서원보다 41년 나이가 적은 노강서원의 강당은 돈암서원의 응도당과 함께 충남지역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이면서 닮은 꼴로 지어졌다. 전체적으로 응도당의 건축기법이 고스란히 논아든 이 강당은 응도당의 특징도 빼닮았다. 겹처마 맞배지붕인데, 풍판 아래에 눈썹지붕을 달아낸 것. 이는 응도당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기법으로 노강서원 강당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특징 중 하나이다.
노강서원의 눈썹지붕은 응도당과 같이 강당 양 옆의 창호로 들이치는 비바람과 햇볕을 가려줘 풍우로부터 훼손을 방지하고자 하는 기능성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맞배지붕 집에 달아낸 눈썹지붕은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면서도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하는 모습에서 집 구경의 재미를 더하게 한다. 기단을 한껏 높인 건물의 외관을 시각적으로 안정되게 하기도 한다.
서원의 강당 정면. 양 옆으로 달아낸 눈썹지붕이 배흘림기둥과 함께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면서 예스러움을 더한다.
겹처마 맞배지붕과 눈썹지붕이 주는 멋스러움은 돈암서원의 응도당과 사뭇 다른 감흥을 준다. 평지에 세워진 응도당과는 달리 높은 기단 위에 있는 노강서원의 강당이 주는 시각적 차이이다.
서원의 강당 기둥에서 300여년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청방간의 맹장지 4분합 굽널띠살 들문은 17세기 초 건물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창호로 옛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서원 강당의 오른쪽 측면.
서원 강당의 뒷면 모서리 풍경. 마름을 댄 창호에서 금방이라도 유생이 고개를 내밀 듯하다. 강당의 협칸 아래 함실아궁이가 눈길을 끈다.
숭의재 담장에서 바라본 서원 강당. 눈썹지붕이 맞배지붕의 단조로움을 없앴다.
서원 강당의 옆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