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논산여행
500년 전통 논산의 민속놀이, 연산백중놀이
연산백중놀이는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서 전승되어 온 민속놀이이다. 조선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서석 김국광(1415~1480)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처음 시작되어 500여년이 넘는 전통을 지녔다. 1481년 백중날(음력 7월 15일)에 당시 연산면의 27개 마을 주민들이 김국광의 묘소를 참배한 후 크게 난장을 트고 대동놀이를 편 것이 그 시초였다. 그때 백중날은 농사가 끝나 머슴들이 쉬다고 하여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이날 음식을 차려놓고 놀던 풍속이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김국광의 후손들은 연산면 일대에서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백중놀이는 크게 성해졌다. 한 때는 연산을 오가는 길손은 물론 전국의 한량들까지 모여들어 함께 즐기는 축제로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놀이비용을 전담한 광산 김씨 친가의 장독이 행사가 끝나면 바닥나고 인근 고추밭에는 고추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으며 농신제를 지낼 때는 통돼지를 재물로 쓰는가 하면 멍석 80매도 손님을 치르기에 모자랐다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놀이의 내용을 보면 연산면의 27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각 마을마다 두레의 우두머리격인 좌상이 정해졌다. 이들 가운데 8명을 다시 지역 좌상으로 뽑았고, 여기에 총 지휘자인 도영상이 있었다. 모든 행사는 도영상의 지휘아래 진행되었으며 도좌상기(基)는 쌍룡기로 지역좌상기는 청룡기와 황룡기로 표시하였다. 행사가운데 농신제는 농민들이 농사지을 때 농기구에 다치지 않도록 기원하는 것이었다. 특히 현에서 한 명씩 선발한 효자효부를 표창하고 불효자는 쌍룡기에 묶어놓고 교화하여 부모를 여읜 후 3년간의 시묘살이를 시키도록 했다. 또한 그 해 농사를 잘 지은 머슴에게는 쌀과 의복을 주어 치하했다.
첫째마당은 각 지역 놀이패들이 연산백중놀이를 시작하기 위하여 지역좌상들의 인솔하에 용기, 농기 등 각종 기를 선두로 풍물을 치며 놀이마당으로 집결한다. 지역의 놀이패들이 놀이마당으로 집결하는 중간지점에서 타 놀이패와 만나게 된다. 놀이패들은 서로 질세라 한바탕 기싸움을 벌인다. 이때 기를 먼저 넘어뜨리는 편이 승리하게 된다. 진편에서는 이를 승복하여 앉아서 억울함을 통곡한다. 이를 목격한 도 좌상은 나팔고리로 기싸움을 진압한다.
둘째마당은 기싸움이 끝나면 놀이패들이 놀이마당에 집결하여 지역 좌상기는 도 좌상기인 쌍룡기에 대하여 기세배를 한다. 이때 도좌상은 백중놀이에 합류해도 좋다는 화합의 뜻으로 지역 좌상 용기목에 백색 띠로 목도리를 해준다.
셋째마당은 기세배가 끝나고 도좌상과 지역좌상 그리고 측관은 놀이패를 대표하여 국태민안과 세화연풍을 기원하는 농신제를 지낸다.
넷째마당에서는 농신제가 끝나면 세화연풍과 그 해 농사질 때 농기구인 연장에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액풀이로서 가래, 삽, 쇠스랑, 낫 등 각종 연장을 농신대에 소각하는 불에다 넘기며 액막이 노래를 부른다.
다섯째마당에서는 농신제가 끝나면 연산면 내에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효자와 효부를 놀이마당에 데려다 포상하고 격려한다. 다섯째마당에 이어 여섯째마당에서는 효자·효부 포상이 끝나면 불효자식을 두어 누구에게도 말은 못하고 홧병으로 누웠다는 소식을 접하고 불효자를 놀이마당에 대령시켜 쌍룡기에 묶고 징벌한다. 그런 후 불효자로 하여금 앞으로 부모님게 효도는 물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3년 시묘살이를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귀가시켰다. 이후 불효자는 부모에게 효도는 물론 삼년 시묘살이까지 실천하여 후에 효자비까지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곱째마당에서는 불효자 징벌이 끝나면 그 해 가장 농사를 잘 지은 상머슴에게는 푸짐한 상을 주며 격려한다.
여덟째마당에서는 머슴에게 포상이 끝나면 동리사람들은 머슴들을 지게가마에 태우고 동리마당을 돌며 축하와 위로를 해준다. 이 때에 머슴들은 즐거워 흥겹게 노래부르며 춤을 춘다.
아홉째마당에서는 여덟째마당이 끝나면 충청도 전통풍물가락인 찍찍이, 7채, 5방감기 등 흥겨운 마당놀이로서 백중놀이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