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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강경젓갈축제

서브비쥬얼 이미지

젓갈이란

어패류의 육, 내장, 생식소등에 식염을 가하여 부패를 억제하면서 자기소화 및 미생물의 작용에 의하여 원료를 적당히 분해시켜 숙성시킨 제품이 젓갈(salted-fermented sea foods)이다. 젓갈은 어패류를 염장법으로 담근 것으로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여러 생선과 새우, 조개 등에 소금을 약 20% 섞어서 절여 얼마 동안 저장하면 특유의 맛과 향을 내게 된다. 젓갈은 숙성 기간 중에 자체에 있는 자가분해효소와 미생물이 발효하면서 생기는 유리아니노산과 핵산분해 산물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특유의 감칠맛이 나는 것이다. 작은 생선의 뼈나 새우, 갑각류의 껍질은 숙성 중에 연해져서 칼슘의 좋은 급원식품이 되기도 한다. 음식의 간은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데 서울을 포함한 중부 지방은 입맛이 중간 정도이며, 추운북쪽 지방으로 갈수록 싱겁게 먹고,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짜게 먹는다. 그래서 짠맛이 강한젓갈은 남쪽 지방에서 특히 발달하였고, 북쪽 지방에는 거의 없다.

강경 젓갈 이미지 HISTORY

젓갈의 유래

젓갈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음식이다. 한나라 무제가 동이족을 쫓아서 산동 반도에 이르렀을 때, 어디서인지 코에 와 닿는 좋은 냄새가 나서 찾아보게 하니 어부들이 물고기 창자와 소금을 넣고 흙으로 덮어 둔 항아리에서 나는냄새였다. 이것이 바로 젓갈이었다고 한다. 오랑캐를 좇다가 얻은 음식이라 하여 젓갈을 '축이(逐夷)'라 이름 지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동이족이 젓갈의 문화를 유지하고 발달 시켜왔음을 알 수 있다.

젓갈이야기

오징어젓

임진왜란 때 원병 온 명나라 장수가 의주에 피난 가 있는 선조에게 '계두'라는 희귀한 음식을 선물로 바쳤다. 계수나무 속에서 자라는 벌레를 볶은 것으로, 월남 왕이 공무로 바치는 귀물이었다. 한데 선조 임금은 오래도록 주저하고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대신 선물에 대한 반례로 '십초어'국을 보냈는데, 명장 역시 난처한 빛을 보이며 먹지 않았다 한다. 십초어란 바로 오징어다. 다리가 여덟 개인 문어나 낙지를 팔초어라 한고, 다리가 열 개인 오징어를 십초어라 부른 것이다. 실은 오징어의 다리도 여덟 개다. 양쪽으로 별나게 긴 두 다리는 다리가 아니라 팔이다. 그 긴 팔은 먹이를 잡아먹을 때 쓰며, 사랑을 나눌 때 암컷을 힘껏 끌어안는 수단으로도 쓴다하여 '교미완'이라고 부른다. 동해안에서는 부녀자가 오징어 팔을 먹으면 흉이 된다는 터부가 있다. 반면에 오징어 팔 서른세 쌍만 뜯어먹으면 속살이 찌고 남편한테 굄을 받는다 하여 오징어 말리는 해변에 오징어팔 도둑이 성행했다고 한다. 노련한 어부는 몸에 오색이 영롱한 오징어가 걸려들면 다시 환생시켜주는 것이 도리하고 말한다. 오색빛이 나는 것을 공작오징어라 속칭하는데, 발정하여 암컷을 찾아다닐 때 잠시 발광하는 수놈의 체색으로 인한 것이다. 공작오징어를 잡지 않는 것은 오징어의 발정을 보장해 주는 인간적 배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번의 사랑에 30만∼50만 개의 오징어알을 낳는다는 수자원적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리굴젓

해산물은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기호가 무쌍하다. 한데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즐겨 먹는 것이 꼭 한가지 있다. 굴이다. 토머스 플러가 '사람이 날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육류가 굴이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유럽에서 생식하는 단 한가지 해산물이 굴이었던 것 같다. 굴은 이미 로마시대부터 양식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에서는 연중 이름에 'R'자가 안든 달 에는 굴을 먹지 말라는 속전이 있다. 5월에서 8월 사이가 해당되는데, 굴의 산란기라서 맛도 떨어지고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맘 내키는 대로) 에 굴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더러운 굴 껍데기 속에 진주가 박혀 있듯, 가난한 집에도 마음이 풍요로운 정직한 사람이 살고 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을 '굴 같은 사나이'라 하고, 정조가 강한 여인을 '굴 같이 닫힌 여인'이라한다. 도덕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누려온 굴이다.

새우젓

중종때 판서를 지낸 청빈한 선비 김안국이 인심을 잃어가며 재물을 모으고 있는 한친구에게 훈계의 편지를 띄었다. 그 편지 가운데 "밥 한 숟가락에 새우젓 한 마리만 앉으면 먹고 살 수 있는데" 하는 대목이 있다. 새우젓은 한국사람이 흰밥을 먹구멍에 넘길 수 있는 최소 단위의 건건이요, 오랜빈곤 수천년을 살아낼 수 있었던 최저의 생존조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옛날 산촌에 새우젓장수가 들르면 처녀는 중신아비 들르는 것보다 반갑고, 서방님은 장모 들르는 것보다 반가웠다는 속담이 있다. 새우젓장수는 부잣집 사랑에 모셔졌고, 젊은 무당을 곱게 단장시켜 슬며시 그 방에 넣어주곤 했다. 삼남 지방의 속어에 '덤통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목적을 위해 계략적으로 웃는 웃음이다. 새우젓장사는 젓갈이 들어 있는 알통과 젓갈국물이 들어 있는 덤통 둘을 나란히 메고 다녔다. 젓갈을 산 사람들이 덤통을 바라보며 히죽이 웃어 새우젓장수의 애간장을 간지럽히면, 장수는 덤통을 열고 젓국을 더 펴주었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여러가지 젓갈

산동 반도는 우리겨레의 활동 무대였으므로 우리 조상은 일찍부터 젓갈을 조미료로 사용하였다. B.C 3∼5세기의 중국「이아」라는 사전에는 "생선으로 만든 젓갈을 '지', 육으로 만든 젓갈을 '해'라 한다"고 하였고, 그 후의 문헌에는 지, 자, 해 등이 나온다. 5세기경의 「제민요술」에는 "장에는 누룩과 메주, 술, 소금으로 담그는 직장법과 수조어육류, 채소, 소금으로 담그는 어육장법이 있다."고 씌어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문왕 8년(683년)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납폐품목에 '장'과 함께 '해'가 적혀 있다. 해는 젓갈을 말한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는 어패류를 소금에만 절이는 저염해, 젓갈과 절인 생선에 익힌 곡물과 채소 등을 합하여 숙성시키는 식해로 크게 나뉘었다.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정사, 의서류, 및 문집 등에 젓갈류의 식용배경 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젓갈의 종류도 다양해져 제사상에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젓갈과 관련된 자료들은 일반 민간인에 의해 쓰여진 각종 일기류에서도 자주 발견된 것을 알 수 있어 그 식용범위가 비교적 보편화되고 그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였음을 알수 있다. 조선시대의 젓갈 담그는 법은 소금에만 절인 것, 소금과 술과 기름 등을 섞어서 담근 것, 소금과 누룩에 담근 것, 소금, 엿기름, 찹쌀밥 등을 섞어서 담근 것 등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고 그 종류는 현재보다 훨씬 다양하였다고 한다. 또 젓갈을 담글 때 술이나 누룩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주조법에서 연유한 것으로도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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