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황 선생은 선조5년(1572)에 태어나 선조30년(1597)에 장원급제, 봉상시정의 벼슬을 거쳐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다. 1627년, 1636년의 양호란 때는 척화를 주장했다. 벼슬은 대사성에 이르렀고,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노성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공으로 노강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본래 윤황선생 묘소는 노성면 가곡리 애감티에 잠시 모셨다가 현재의 장지로 이장되었으며 묘소 전면 좌측에 있는 묘비는 팔송 선생 3자 상거가 황해도 백천 부사로 재직시 백천 땅에서 질좋은 오석을 아버지 묘비로 세우고자 육로로 운반 건립되었는데 훗일 조정에서는 이 사실이 민폐가 많았던 것으로 조사되어 관직을 파직하였다. 비신과 비갓기단 석재가 대형으로 비갓은 장방형의 옥개석으로 만들어져 군내 신도비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1571(선조 4)~1639(인조 17), 조선 중?袖?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창세(昌世)의 아들이며 전의 형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